아름다움은 물리적인 감각인가?
신경미학의 연구 결과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인간이 아름다움을 인지할 때 내측 안와전두피질이 활성화된다. 더 아름답다고 느낄 때 활성화되는 정도도 비례한다. 여기서 여러가지 의문을 느낄 사람들이 많을 텐데, 연구는 생각보다 폭넓게 진행되어 시각적인 것,
청각적인 것, 개념적인 것으로부터 느끼는 아름다움에 대해 모두 동일한 결과를 보여준다. 개념적인 것에는 심지어 수학 공식의 아름다움(그 유명한 오일러의 수식!)과 윤리적인 행위까지 포함된다. 따라서 내측 안와전두피질이 손상된 사람은 도덕적으로 적절한 판단을 행할 수 없다.
흥미로운 연구는 더 많은데, 가령 미술적으로 훈련받은 전문가와 일반인의 아름다움에 대한 지각 방식도 다르다. 시각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에서 우선 차이가 있고, (아이트래커 같은 시스템을 활용해보면) 일반인은 원근적 소실점 같은 시각적 자극에 충실하게 따라가는 반면 전문가는 일정한 패턴에
아 원래 덧붙이려고 했던 얘기는 진리의 발견에 꼭 아름다움이(위의 바일의 사례처럼) 도움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였는데, 가령 케플러는 천체의 운동이 아름답고 조화로운 원 운동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타원 운동이라는 흉측한 가설을 선택하고서야 올바른 천체 운동을 계산해낼 수 있었다.
따라 그림의 전체적인 구도를 훑는 경향이 보인다. 이후의 아름다움에 대한 지각도(안와 전두피질의 자극 정도를 포함하여) 다르게 나타나는데, 일반인 그룹은 친구나 전문가의 평가, 혹은 실험의 후원 기업 등의 “라벨링”에 의해 휘둘리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 전문가 그룹은 배외측 전전두피질
큐비즘의 시초가 된 피카소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 (1907), 큐비즘 기법으로 애인 마리 테레즈의 초상을 그린 유명 작품 <꿈> (1932), 큐비즘 기법으로 애인 도라 마르의 초상을 그린 유명 작품 <도라 마르의 초상> (1937), 도라 마르의 작품 제작 추정 시기 <Double Portrait with Hat> (1936-1937)
사실 책 요약을 내 맘대로 거칠게 한 편인데(가령 아름다움이 물리적 감각이라느니 하는 자극적인 선언은 책에 없어요, 뭔가 일본인 학자답게 굉장히 조심스럽고 겸손하게 쓰인 책입니다) 조금 더 덧붙이자면, 진선미의 상관관계에 대한 것이다. 가령 수학자 헤르만 바일은 아름다움과 진실 중 하나를
진의 영역에까지 개입하고 기여하는 미의 중요성을 말하려는 듯하다. 선의 경우 또한 말할 것도 없이, 윤리학과 미학의 관계는 고대 그리스부터 칸트에 이르기까지 어쩌구… 인데 (이 책엔 칸트가 뇌과학적으로도 그럴듯했음을 증명하는 내용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문장은 라캉의 다음과 같은 표현
택하라면 아름다움을 택하겠다,고 말할 정도로 미에 진심인 사람이었고 자신이 연구한 수식이 기존의 수학적 진리와 맞부딪게 되자 그냥 발표해버린다…… (맥락상 어찌됐든, 수식이 아름다웠기 때문) 이후 바일의 수식은 양자역학의 발달에 기여했다고 하는데, 저자는 이러한 바일의 사례를 통해
TOYBOX 4호 SF 특집에 참여했습니다. 원고지 120매 분량의 시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텍스트(?)와 10장의 사진으로 구성된 텍스티미지Textimage 작업입니다. 네, 장르명은 제가 만든 조어입니다. 오래된 친구와 영감을 주고 받으며 함께 작업했어요.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소위 문단 문학(?)에 대한 이런 류의 비판을 자주 접하는데, 사실 이런 비판도 좀 지겨운 것이, 아무래도 장르화 되어버린 게 아닌가 싶다. 일단 문단 문학이라는 것이 현대문학-본격문학, 순수문학 따위로도 불리는-을 의미한다면, 현대문학의 탈서사 경향은 세계 어디를 가든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이번 문사 겨울호에서 가장 재밌게 읽은 건 조효원 편집동인의 글이었는데, 아감벤 번역자로서, 아감벤을 야멸차게 까댔던 사사키 아타루를 인용해가며 문학 얘기하는 게 재밌었다. 사사키가 <야전과 영원>의 보론에서 결국 견유학파를 재조명하는 것과 조효원이 이 글에서 결국 결의론을 이야기하는
자본의 무서운(답이 없는) 점은 그것이 이데올로기가 결여된 채 작동하는 것처럼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인데 가령 ㅡ 할리우드나 넷플릭스가 제공하는 서사물에 인심 쓰듯 들어가 있는 성/인종 쿼터제는 그것이 도덕적이어서가 아니라 그게 더 잘 팔리기 때문이다 ㅡ 이런 문장이 어느 정도는
AI가 만들어낼 예술이 분절된 의미로, 무의미의 차원 위에 구현될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나로선 삼행시 어플이 꽤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어디까지나 인간적 의미의 빅데이터 기반이기에 경계선에 발을 걸치고 있긴 한데… 따라서 더더욱 인간이 쓰는 시는 반대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해짐
글을 쓸 때 픽션은 더 겁이 나지만 논픽션은 더 어렵다. 논픽션은 현실에 기반하고 있고 오늘날 느껴지는 현실은 압도적으로, 회로가 터질 정도로 거대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반면 픽션은 무에서 나온다. (…) 픽션의 심연은 침묵, 허무다. 반면 논픽션의 심연은 (…) 무한한 선택의 완전한 자유다
RT) 문학을 거의 안 읽거나 전시회를 거의 가지 않는 사람들은 주변에 널렸지만, 음악을 듣지 않는 사람은 없다. 진심으로, (몇몇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음악을 듣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사람들은 각자의 음악 취향이 분명하다. 전위적인 음악 장르를 즐기기 위해선
사실에 부합하기 때문이며 오히려 그것은 (자본이) 무해하고 중립적이라는 인상마저 풍긴다. 물론 그 이면에는 <예스터데이>에서 드러나듯 백인 지배계급의 좋았던 시절에 대한 유치한 향수와 문화적 헤게모니를 뺏기게 될 지도 모른다는 저열한 공포가 자리잡고 있으며 이것은 유해하다. 실로
현대문학은 오래 전부터 이야기의 불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문제점은 이 이야기의 패턴이 고착화되어 새롭지 않다는 것이겠지,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을 잃었다고 보는 것은 핀트가 좀 어긋난 게 아닌가 싶다. 현대미술하는 작가에게 왜 사실적인 작화를 못하냐고 비판하는 거랑 똑같다.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겠다. 텍스트의 내부에서 시는 픽션과 논픽션 중 무엇에 속하는가? 픽션, 이라고 답할 수 밖에 없지만... 흥미로운 건 보편적으로 우리가 시를 통해 '문학적인 고양'이라고 표현할 만한 감정을 얻는 순간은, 시의 내부에서 논픽션에 가까운 성질이 강렬하게 드러날 때라는 점이다
현대미술이나 현대음악하는 인간들이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는 능력을 잃고, 듣기 좋은 화음과 리듬을 작곡하는 능력을 잃어서 그러는 걸까?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겠지. 뻔하고 재미도 없으니까. 그런데 왜 사람들은 유독 문학에 혹독한가? 문학이 만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문학은
Rt) 글쎄요 저는 인텔리들이 악플러를 바라보는 시선이 오히려 허구 서사의 납작한 대중을 바라보는 종류의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드네요. 악플러들이 정말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도덕적 문제의식에서 연예인을 비난하는 걸까요. 그보다는 어떤 식의 꼬투리든 발견해서
벤야민과 브레히트는 베프였는데 어느날 벤야민은 자기가 쓴 카프카 비평 원고를 브레히트한테 읽어보라고 건네주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피드백이 없자 소심해진 벤야민은 (삐져서) 브레히트의 책상 위에 있던 자신의 원고를 몰래 들고 나와버렸다...... 벤야민쨔응 기여어...
유명인들에게 흠집을 내고 싶은, 그것이 나아가 그들에게 어떻게든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길 바라는 비틀린 자의식의 발현이 아닐까 싶어요. 현실의 보잘 것 없는 열등한 내가 부와 명성을 지닌 인플루언서를 비난하고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니! 하는 종류의 열등감으로부터